목차
- 서론
- [아무도 아닌] – 황정은
- 담담한 문장으로 세상을 베다
-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이야기
- 작품 평가
서론, 당신도 혹시 스스로를 '아무도 아닌' 사람이라고 느낀 적 있나요?
이 책 제목을 처음 봤을 때, 잠깐 멈칫했어요. [아무도 아닌]. 누군가를 가리키는 말인지, 아니면 나 자신을 향한 말인지 금방 판단이 안 섰거든요. 황정은의 세 번째 소설집인데, 문학동네에서 나온 책이에요. 여덟 편의 단편이 묶여 있고, 수록 작품 중 일부는 이미 발표 당시부터 꽤 회자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가 첫 단편 읽고 나서 책을 덮어버렸어요. 읽기 싫어서가 아니라, 뭔가 너무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어서요. 그러고 나서 다시 펼쳤는데, 결국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 황정은 작가가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쓰는 사람인지 궁금한 분들이라면, 이 소설집이 좋은 출발점이 될 것 같아요.
[아무도 아닌] – 황정은, 담담한 문장으로 세상을 베다
황정은이라는 작가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화려한 수식어 없이, 그냥 이름 세 글자만 있는데도 어딘가 낯설지 않은 느낌. 이 작가는 말이 많지 않아요. 인터뷰에서도 그렇고, 소설 안에서도 그렇고요. 그런데 바로 그 절제된 문장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독자를 찌릅니다.
[아무도 아닌]에 실린 이야기들은 전부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 법한 일들이에요. 계약직으로 살아가는 사람, 층간 소음에 지쳐가는 사람, 누군가를 잃고 방 안에 혼자 남은 사람. 황정은은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신파로 흘려보내지 않아요. 그냥 거기 있는 그대로, 서늘하고 정확하게 들여다봅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오래 마음에 남는 것 같아요.
담담한 문장으로 세상을 베다, 2010년대 한국 사회의 균열을 담아낸 소설집
[아무도 아닌]의 단편들이 쓰인 시기가 어떤 시절인지 알면, 이 소설집을 읽는 감각이 조금 달라집니다. 2012년부터 2015년 사이, 한국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여러 군데가 조금씩 균열하고 있었어요. 비정규직 노동자가 일상이 된 고용 구조, 도시 안에서 서로를 알지 못하는 채로 벽 하나만 사이에 두고 살아가는 아파트 문화, 갑작스럽고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집단적 상실. 이 모든 것들이 동시에 일어나던 시간이었는데, 황정은은 그 시간을 정직하게 통과하면서 소설을 썼어요.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소설집이 그 사건들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어떤 특정 사건의 이름을 가져다 쓰거나,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는 문장을 끼워 넣지 않아요. 그냥 그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감각을 통해서, 독자가 그 공기를 몸으로 느끼도록 만들어요. 이게 황정은 소설의 방식인데, 직접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작동합니다.
제가 이 소설집에서 특히 주목한 건 '미완결의 구조'예요. 대부분의 이야기가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아요. 인물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독자도 어떤 결론을 받아 들고 끝내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그게 좀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읽다 보니까 이게 오히려 솔직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실제로 그렇잖아요. 층간 소음 문제가 어느 날 갑자기 깔끔하게 해결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비정규직으로 버텨오다가 갑자기 정규직이 되어서 모든 게 나아지는 경우가 흔할까요? 황정은은 그 불편한 사실을 소설의 형식 자체로 보여줍니다. 미완결이 리얼리즘의 한 방식이 되는 거죠.
또 하나, 이 소설집에서 노인 화자가 여러 번 등장한다는 점도 인상적이에요. 빠르게 변하는 세계에서 제일 먼저 아무도 아닌 존재로 밀려나는 게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이건 단순한 소재 선택이 아니에요. 치매를 앓는 노인이 기억을 잃어가면서 경험하는 세계, 그 흐릿해지는 과정을 황정은은 매우 천천히, 촘촘하게 따라가요.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이 곧 존재가 지워진다는 것과 얼마나 가까운 개념인지를, 이 소설은 독자에게 직접 묻지 않으면서도 묻게 만들어요.
황정은 소설이 다른 동시대 소설과 가장 다른 점을 꼽으라면, 저는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라고 말할 것 같아요. 보통 소설에서 슬픔이나 상실을 묘사할 때, 독자가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감정을 키우는 장치들이 들어가잖아요. 황정은은 그걸 일부러 빼요. 슬픔 직전까지만 써놓고 멈춰요. 그래서 독자가 그 여백 안에서 스스로 감정을 채우게 됩니다. 이게 더 오래 남는 이유예요. 내가 직접 채워 넣은 감정은 쉽게 잊히지 않으니까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이야기, 여덟 편의 단편이 그려내는 균열의 자리들
[아무도 아닌]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이 있어요.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혼자인가? 각 단편의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립되어 있는데, 그 고립이 자발적인 경우는 거의 없어요.
「上行」은 지하철이라는 공간에서 시작해요. 위로 올라가는 방향을 뜻하는 제목인데, 소설 안에서 실제로 '올라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조용하게 내려앉는 감각이 전편을 채웁니다.
당신이 매일 지하철을 타면서 스쳐 지나가는 낯선 사람들, 그 사람들 각자에게 어떤 삶이 있는지 생각해 본 적 있나요? 황정은은 그 스침의 순간 안에 한 사람의 무게 전체를 밀어 넣어요.「양의 미래」에는 소녀의 실종이 나와요. 그런데 소설이 집중하는 건 사건 자체가 아니에요. 그걸 목격한 사람이 이후 어떻게 그 기억을 짊어지고 살아가는지에 훨씬 더 오래 머뭅니다. 목격자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한 사람의 일상을 어떻게 조금씩 갉아먹는지를 황정은은 느리고 정밀하게 따라가요.
이 단편을 읽고 나서 한참 동안 멍하게 있었어요. 이건 트라우마에 대한 심리적 묘사이기도 하지만, 그 시절 이 나라에서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공유했던 어떤 감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누가」는 층간 소음이에요. 처음에 이 소재를 봤을 때는 솔직히 '이게 소설이 될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읽다 보면, 층간 소음이 단순한 생활 민원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게 돼요. 위층 소리가 한 인물의 신경을 서서히 무너뜨려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이건 소음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일상의 누적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더 흥미로운 건, 소음을 만드는 위층 사람도 딱히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이에요.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이렇게 모호할 때, 분노는 어디를 향해야 할까요? 황정은은 그 질문을 독자에게 넘깁니다.
「웃는 남자」는 이 소설집에서 제가 제일 오래 생각했던 단편이에요. 아내를 잃고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둔 남자가 주인공인데, 황정은은 이 인물에게 격렬한 슬픔의 장면을 주지 않아요. 울부짖거나 무너지는 장면이 없어요. 그 남자는 그냥 방 안에 있어요. 창문을 보거나, 아주 작은 행동을 하거나, 아니면 그냥 있어요. 그런데 그 '그냥 있음'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는지를 황정은의 문장이 전달해 줍니다. 애도가 얼마나 사적이고, 형언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이 단편은 보여줘요.
「상류엔 맹금류」에는 과거의 연인이 나와요. 끝난 관계인데, 기억은 끝나지 않는 경우요. 어떤 관계는 몸에 남아서 현재를 계속 건드려요. 황정은은 그 끈질긴 기억의 작동 방식을, 포식자가 먹잇감을 노리는 이미지로 풀어내요. 사랑이 때로 그런 구조를 갖는다는 것, 그 구조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잃어가는지를 이 단편은 냉정하게 보여줍니다.
감정노동을 다루는 이야기도 있어요. 웃어야 하는 자리에서 하루 종일 웃어야 하는 사람. 상처받을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 자리에서 버텨내는 사람. 이 사람들은 왜 계속 아무도 아닌 존재로 취급받아야 하는 걸까요? [아무도 아닌]이라는 제목은, 이 질문에 대한 황정은의 긴 대답이에요.

작품 평가, 어둠 속 틈새에서 간신히 새어 나오는 빛 같은 소설집
이 소설집을 덮고 나서 드는 감각은 명쾌한 해소감이 아니에요. 뭔가 마음 어딘가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오래 있는 느낌이에요. 황정은은 세상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면서도 그걸 비관으로 끝내지 않아요. 희망을 직접 말하지도 않지만, 어둠 속 아주 좁은 틈에서 간신히 새어 나오는 빛의 가능성을 문장의 결에 남겨두는 작가예요. 개인의 상실과 사회 구조의 균열을 동시에 응시하면서도 독자에게 감정적 여지를 주는 절제, 그게 [아무도 아닌]이 단순한 사회 고발이나 감성 소비에 그치지 않는 이유입니다.
어떤 분들께 이 책을 권하고 싶으냐면요. 지금 자신이 이 세상에서 충분히 보이지 않는다고 느끼는 분들, 일상의 고립과 소외를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몸으로는 알고 있는 분들께 이 소설집이 조용한 위로가 될 거예요. 또, 한국 현대 단편 문학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궁금한 독자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기도 해요. 화려한 문장보다 정확한 문장이 더 오래 남는다는 걸 믿는 분들, 황정은을 처음 만나는 분들께도 이 소설집이 가장 좋은 첫 만남이 될 것 같습니다.